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르키예-이란-아랍권 관계 (문단 편집) === 중세 === [[우마이야 제국]]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다. 그러나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페르시아인 차별은 호라산 지역에서 대대적인 봉기의 원인이 되었고, 이후에는 [[아바스 왕조]]가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정복했다. 이슬람 제국의 정복 이후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종교-법률-행정 용어로는 아랍어가 기타 학술 용어로는 중세 페르시아어가 사용되었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활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이슬람화 이전에는 박트리아어, 토하라어, 호라즘어, 소그드어 등등의 다양한 [[이란어군]] 언어가 사용되었으나 이슬람화를 계기로 중세 신페르시아어가 공용어가 되면서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페르시아어권의 저변이 오히려 아랍의 정복 이후 과거보다 더 크게 확대되었다. 아바스 칼리프조의 동방 영토에 페르시아계 군벌 왕조인 [[사만 왕조]]가 들어서면서 중세 페르시아어는 투르크인들에게도 폭넓게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카라한 칸국]] 등 투르크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슬람화하였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계 민족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터키인들은 순니 이슬람 중에서도 [[하나피파]] [[마드하브]]에 속하는데 원래 하나피파는 (당시 새로 페르시아어권에 편입된) [[카불]] 출신이었던 아부 하니파가 정립한 학파이다. 하나피파는 지역 관습법을 중시하는 학파로 특히 중세 페르시아인들에게 호응이 좋았다.[* 하나피파의 시조이자 압바스 칼리프조 초창기 인물이었던 아부 하니파는 한 번은 쿠란을 페르시아어로 낭독하면서 예배를 보았다가 뒤에서 함께 예배보던 사람 중 한 명이 "(쿠란을 아랍어 그대로 낭독하지 않고) 그렇게 예배하면 예배가 무효화됩니다."라고 말하자 다시 쿠란을 아랍어로 낭독해서 예배를 보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같은 맥락에서 튀르크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중동으로 유입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과정에서도 하나피파를 받아들였다. 후대 페르시아인들이 시아파로 개종하는 와중에도 투르크계 무슬림들 중앙아시아의 [[타지크인]]들은 하나피파 법학파를 따르는 사조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우마이야 제국 시대에는 무슬림 군대의 주력이 아랍인이었다면 압바스 제국 시대에는 [[칼리파]] [[알 무타심]] 치세 들어서 이슬람 제국 군대의 주력은 [[맘루크|투르크인 노예병]]으로 변하게 되었다. [[아바스 왕조#하룬 알 라시드의 아들들|자세한 내용은 압바스 칼리프조 문서의 해당 항목 참조]] 이를 계기로 점점 병권을 상실한 아랍인들은 점점 이슬람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투르크인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칼리프조 시기 아랍인들이 병권과 정치 권력을 모두 장악했을 시기에는 무슬림 정권이 관료들에게 봉급을 주는 관료제로 운영되었다면, 중동의 투르크계 군벌 왕조들은 군인들에게 돈으로 봉급을 주는 대신에 토지의 수조권을 주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무슬림 사회의 화폐 경제와 기업적 농업 경영이 쇠퇴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중세 당시에는 아직 페르시아인 대다수가 순니파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반아랍-반이슬람 성향의 [[호람딘]] 세력이 무슬림들과 대치하고 있었고 이 외에도 페르시아계 시아파 세력 군벌 왕조인 [[부와이흐 왕조]]가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를 보호 명목으로 압박하였다. 부와이흐 왕조는 동쪽의 투르크계 [[가즈니 왕조]]의 공격을 받았고, 이후 투르크계 [[셀주크 제국]]에게 최후의 일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부와이흐 왕조와 셀주크 제국 사이의 대치는 후대 시아파 [[사파비 제국]]과 순니파 [[오스만 제국]] 사이 이라크를 두고 벌어진 전쟁의 복선이 되는 셈이었다. 중세 아랍-페르시아-투르크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로는 셀주크 튀르크의 명재상이자 페르시아인이던 [[니잠 알 물크]]를 들 수 있다. 이슬람화 이전 [[돌궐 제국]]의 괵튀르크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소그드인]]들과 공존하던 상황이었는데[* 내정과 상업은 소그드인이 맡고 군사 분야는 주로 괵튀르크인들이 맡았는데, 일방적으로 괵튀르크인들이 소그드인들을 지배하는 구조가 아니라 양자가 상호 평등한 상황에서 공존하던 상황으로 보인다. 당시 돌궐 제국 유적지에서 나온 결혼 관련 문서를 보면 괵튀르크인과 소그드인 사이의 통혼도 흔했고, 결혼은 양자 사이에 상호 평등한 관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중세 셀주크 제국의 투르크인과 페르시아인들의 공존 관계로 그대로 이어졌다. 니잠 알 물크는 한편으로는 무역로를 정비하고 내치를 다져서 세입을 증대시켰으며, 조폐국들을 정비하여 물가를 안정시켰다. 니잠 알 물크가 내치에 전념하는 동안 셀주크 제국의 군주 [[알프 아르슬란]]은 대외 정복전쟁 등에 전념하면서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 1세]]의 동로마 제국 군대를 섬멸하였고 셀주크 제국은 중동의 패자로 거듭났다. 다른 한편으로 니잠 알 물크는 그동안 페르시아인들과 투르크인들에게 인기가 있던 하나피파 마드하브를 견제하고 대신 중동 아랍인들에게 호응도가 높았던 [[샤피이파]]의 아슈아리 신학파를 후원하였다. 당시 니잠 알 물크는 [[시아파]]를 집중 견제하는 정책을 펴던 상황으로 시아파에 대해서 온건한 입장이었던 하나피파 대신에 좀 더 보수적인 순니 법학파인 샤피이파가 더 적합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니잠 알 물크의 지원을 받았던 보수파 신학자 [[알 가잘리]]는 종교적 전통에 충실한 동시에 정치적 현실을 중시하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당시 칼리프가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투르크계 군인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세한 지침과 율법해석을 남겼다. 후원자였던 니잠 알 물크가 사망한 이후 한 때 후원이 끊기고 슬럼프에 빠졌던 알 가잘리는 다시 관변 신학자로 복귀하였는데, 수피즘으로 개종한 투르크인들이 중동으로 이주해오는 당시 상황에서 필요한 율법해석 즉 이슬람 정통파 관점에서 수피즘을 포용하는 종교 해석을 내렸다. 알 가잘리의 수피즘 포용은 이후 수피 이슬람으로 개종한 투르크인들이 중동 이슬람권 각지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